한때 한국 재계 6위 기업으로 발전시킨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26일 7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날 성곡언론문화재단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이른 새벽 3시께 노환으로 별세하였습니다.
고인은 대구 출신으로, 서울고를 졸업한 후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유학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는 부친인 쌍용그룹 창업주인 성곡(省谷) 김성곤님께서 별세하신 뒤인 1975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30세라는 어린 나이에 회사 리더로 나서게 된 고인은 세간의 우려를 뒤로하고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통해 회사의 발전을 촉진시켰습니다.
초기의 어려움과 성장
한때 소규모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에서 시작한 쌍용그룹은 김석원 전 회장의 리더십 아래 방직업과 시멘트업을 시작으로 정유, 중화학, 금융업 등 다양한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습니다. 이 과감한 사업 성장과 빠른 인수 합병 전략 덕분에 쌍용그룹은 쌍용자동차, 쌍용중공업, 쌍용건설, 쌍용정유, 쌍용화재, 쌍용양회, 쌍용투자증권 등을 거느리며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김석원 전 회장은 1974년 용평 스키장을 개발하여 리조트 사업을 선도하는 등 선구자적인 사업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성과로 그는 당시 ‘재계의 3김’으로 불리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과 함께 주목받는 젊은 리더로 손꼽혔습니다.
김석원 전 회장은 작은 비누공장에서 출발한 쌍용그룹을 다양한 사업 분야로의 과감한 다각화와 민첩한 의사결정을 통해 대규모 재벌로 성장시킨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회사의 재기와 다각화를 추진한 그의 노력은 쌍용그룹의 미래 성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대규모 협력사로의 성장
김석원 회장은 쌍용그룹을 국내외에서 대규모 협력사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90년대에는 한국 자동차 산업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쌍용자동차의 설립과 관련된 것입니다.
김석원 회장은 1994년에 쌍용자동차를 창업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여 한국의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석원 회장의 결단력과 지도력은 쌍용자동차가 국제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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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쌍용자동차의 설립은 김석원 회장의 비전과 창의력을 반영한 결과로, 그의 미래 지향적인 리더십이 한국 자동차 산업의 성장과 혁신을 주도한 사례입니다. 이로써 김석원 회장은 쌍용그룹을 국내외에서 대규모 협력사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동향과 파장을 불러온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또한 10년 이상의 성장세를 이어갔던 쌍용그룹은 자동차 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김석원 회장은 ‘자동차 애호가’로 알려져 있었으며, 1986년 동아자동차 인수전에서 어려움을 겪던 상황에서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여 삼성을 제치고 경영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쌍용자동차는 거의 1조원에 가까운 부채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쌍용자동차는 코란도, 무쏘, 체어맨, 렉스턴 등을 출시하여 스포츠 유틸리티차(SUV)와 고급 승용차 브랜드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사업 자체는 적자가 지속되었으며, 그룹 내부에서는 자동차 사업을 중단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석원 회장은 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새로운 도약과 글로벌 진출
김석원 회장은 회사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을 이룩한 데에 성공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환경 친화적인 차량 개발과 글로벌 시장 진출에 주력하여 쌍용자동차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성취하였습니다.
특히 김석원 회장은 환경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환경 친화적인 차량 개발에 주력했습니다. 그는 친환경적인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한 차량을 개발하고 도입함으로써, 쌍용자동차가 환경 보호에 기여하는 기업으로 인식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회사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미래 지향적인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김석원 회장은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주력하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국제 시장에서 쌍용자동차의 제품을 성공적으로 소개하고 확대함으로써 회사의 국제적인 입지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쌍용자동차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을 이끌어내고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공헌과 미래비전
또한 고인은 청소년, 언론, 교육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우선, 국내에 스키 문화를 확장시키기 위해 용평스키장을 창설하여 동계스포츠와 레저산업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의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인은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로서 활약하였으며, 1991년 강원도 고성에서 개최된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의 성공에도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세계청소년캠프 본부장을 맡아 청소년 국제교류에도 기여하였으며, 2000년부터는 3년간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 의장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인은 부친이 창설한 국내 최초 언론문화재단인 성곡언론문화재단과 국민대학교를 운영하는 국민재단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며 사회 공헌에도 노력하였습니다.
김석원 회장은 이와 같은 고인의 사회공헌 정신을 계승하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한 경영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환경 보호와 사회공헌을 통해 쌍용그룹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사실상 쌍용그룹의 해체수순
1996년, 고인은 정계 진출을 시도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쌍용그룹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당시 쌍용차는 매각설 등으로 둘러싸이던 상황이었고, 1997년 12월 IMF 사태 발발 후 단 일주일 만에 대우자동차로의 매각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쌍용그룹은 급격한 하락세를 겪게 되었습니다.
김 전 회장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후보로 당선되어 정치 무대에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룹이 경영 위기에 빠지면서 1998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기업 경영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용그룹은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98년, 쌍용그룹은 채무자들의 요구로 인해 구조조정을 시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인의 경영권도 박탈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2000년에는 쌍용양회의 대주주에서 2대 주주가 되면서 사실상 그룹이 해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쌍용그룹은 그 형태를 크게 바꾸게 되었으며, 이는 고인의 경영 노력 끝에도 마침내 회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마치며
김석원 회장의 뛰어난 리더십과 결단력은 쌍용그룹을 성장과 변화의 길로 이끈 중요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의 경영 비전과 다각화 전략은 쌍용그룹을 작은 비누공장에서 시작해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으로의 진출과 쌍용자동차 설립은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한국 자동차 산업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환경 보호와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으로 쌍용그룹의 이미지는 높아지고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미래 비전은 기업과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고인은 청소년, 언론, 교육 발전에도 노력한 멋진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희생과 노력은 한국 비즈니스의 역사 속에서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김석원 회장의 유가족은 부인인 박문순씨와 아들인 김지용(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김지명(JJ푸드 시스템 대표), 그리고 김지태(태아산업㈜ 부사장)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특1호실에서 마련되었습니다. 발인은 8월 29일 오전 7시 20분에 이뤄지며, 장지는 강원도 용평 선영에 마련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김석원 회장의 업적과 가정에서의 소중한 순간들을 추모하며 장례가 진행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